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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사과의 역사

사과의 역사

우리나라에서 사과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고려때의 계림유사
에서 찾을수 있습니다.

林檎(임금)은 필자부라고도 하고 필부,핑구리라고도 했다는 기록이
있으며 중국의 빈파(頻婆)가 고려 때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고,
또 字會(자회)에 빈파(頻婆)를 『둥근님금』이라 말했으며
朴通事諺解(박통사언해)에는 빈파(頻婆)가 沙果(사과)(중국의林檎)와
모양이 비슷하다는 말이 있어 이조 중엽에도 빈파(頻婆)가 식용으로
사용되고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.

그후 순종 때의 남강만록이란 책에 안평대군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
돌아올 때 査果,一名 氷果(빙과)를 가져와서 심으니

 
 

그 열매가 매우 크고 신맛,떫은맛이 적어 그 당시
누구나 査果(사과)한번 먹어보고 죽자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얘기가
전해지고 있습니다.
그 이후 18세기의 林園(임원)16誌(지)에 廣州(광주)의 명산물로서
林檎(임금)을,함흥의 명산물로서 瀕果(빈과)가 나타났습니다.

유렵에서는능금을 과일의 대표로 삼고 『아담과 이브』
의 실락원에 나오는 과일도 능금입니다.이것이 17세기에 영국민의
노력으로 크고 질이 좋은 품종이 많이 육성되었고 이것이 또 대량으로
미국으로 건너왔으며 1892년 미국인 선교사 후렛차가 『스미사이다』
『레드베어링』『미조리』품종의 서양능금을 가져와서 대구 남산동
자택에 심음으로서 이것이 경북능금재배의 효시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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